- 최한별의 못다한 이야기 -
‘장판(장애인운동판의 준말)’이 뜨겁지 않을 때가 있으랴마는, 그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이슈를 꼽으라면 단연 탈시설 의제를 떠올리게 된다. 장애계는 너무나 강고해 보이는 우리 사회의 보호중심주의에 끈질기게 문제를 제기해왔다. 그리고 이 질긴 문제제기가 탈시설의 기반을 다져놓았다는 증명이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10일 최혜영 의원이 대표발의한 ‘탈시설지원법안’ 제정을 위한 움직임이 한창이고, 문재인 대통령 임기를 1년 남짓 남긴 현재,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였던 중앙장애인탈시설지원센터 설립에도 정부가 의지를 나타내고 있다. 고무적인 일이다. 그런데 탈시설 정책의 책임부처인 보건복지부가 ‘탈시설’이라는 용어의 사용을 꺼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탈시설’ 용어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사회적 합의를 끌어내기에 어려움이 많다. 해외에서도 이를 정책에 전면 사용한 사례가 없다’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복지부의 이러한 입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일단 ‘해외 사례가 없다’는 것부터 틀렸다. 뉴질랜드 보건부는 1994년에 이미 ‘탈시설 계획(Planned Deinstitutionalisation)’을 발표했고, 2006년에는 뉴질랜드 복지부 장관이 국회에서 ‘시설수용의 종식(The end of Institutionalisation)’이라는 제목의 연설까지 했다. 미국 장애인위원회(National Council on Disability)는 2012년에 ‘탈시설: 끝나지 않은 사업(Deinstitutionalization: Unfinished Business)’이라는 제목의 탈시설 정책 툴킷을 발표했다. 유럽연합기본권청(EU Agency for Fundamental Rights)은 모든 회원국에 탈시설 정책 수립 의무가 있음을 강조하면서 “시설에서 지역사회로(From institutions to community living)”라는 보고서를 발간해 배포했다. 시설 소규모화를 탈시설로 오용하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헝가리와 불가리아 등 유럽 국가들도 탈시설을 정책명에 명기하고 있다. ‘해외에서 탈시설이라는 단어를 정책에 사용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복지부의 근거가 무엇인지 오히려 되묻고 싶어진다.
‘탈시설(Deinstituionalisation)’이라는 이 험악한(!) 용어를 전면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곳은 또 있다. 바로 유엔이다. 한국은 2007년 유엔장애인권리협약에 가입했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조항들 중 특별히 중요하고,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조항에 대해서는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아래 위원회)가 유권 해석인 ‘일반논평’을 내놓는데, 탈시설 자립생활 권리를 규정한 ‘유엔장애인권리협약 19조’에 관한 일반논평이 2017년에 나왔다. 뿐만 아니라, 위원회는 장애인 거주시설에 지속적인 재정이 투입되는 것이 ‘중대하고 조직적인 권리 침해’라고 판단, 헝가리에 대한 직권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2020년 9월, 위원회는 ‘탈시설 워킹그룹(Working Group on Deinstiutitonalisation)’을 구성했다. 탈시설 워킹그룹에서 활동하는 요나스 뤼스커스 위원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전 세계 시설 거주인들의 처참한 피해 호소를 통해 탈시설의 긴급성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만들어진 탈시설 워킹그룹은 올해 2월부터 온라인 순회 간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 간담회를 통해 장애인 당사자와 장애인단체, 인권기구 등의 의견을 수렴해 탈시설 정책 가이드라인을 마련하는 것이 목표이다(참고로, 오는 5월 12일에는 한국에서 참여할 수 있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간담회가 열린다). 이러한 일련의 위원회 활동을 통해 탈시설은 유엔에서도 주목하고 있는 중대한 장애인권 이슈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탈시설을 탈시설이라 부르지 못하는 이 ‘웃픈’ 상황은, 아직도 탈시설을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영역으로 인식하고 있는 태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부에서도 똑똑히 알고 있듯, 탈시설은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아니, 이제는 탈시설을 ‘흐름’이라고 말하는 것도 기만적이다. 탈시설은 모든 이들의 권리요, 모든 사회의 의무다.
유엔장애인권리협약 제19조는 장애인의 지역사회로의 완전한 통합과 참여를 촉진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 이행 의무를 규정한다. 조항 이행에 관한 자세한 지침을 담은 일반논평에서는 “‘자립생활’과 ‘지역사회 참여’란 모든 형태의 거주시설 바깥에서의 삶을 의미한다(Both independent living and being included in the community refer to life settings outside residential institutions of all kinds)”고 명시하고 있다. 즉, 자립생활/지역사회 참여는 탈시설이 절대적인 전제조건이다. 아울러 “당사국이 가지는 재량의 영역은 (탈시설의) 계획적 이행에 관련한 것이지, 시설을 자립생활 지원 서비스로 대체할지 여부에 관련한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헝가리의 탈시설 활동가인 스티븐 앨런 또한 “자립생활이 장애인의 권리임은 물론, 탈시설이 정부의 국제규범상 의무라는 메시지를 강력히 지지한다”며 한국 장애계의 탈시설 활동에 강한 연대를 표했다.
명확한 정책 방향, 계획, 기한, 중간목표, 예산을 책정하고 책임감 있게 이행하는 것은 정부의 의무이다. 그러나 현재 정부는 이러한 의무와 정책 방향을 명확하게 제시하기보다, 시설 유지론자들의 기분 맞추기에만 급급하다. ‘해외에서 사용하지 않는다’는 변명이 얼마나 구차한지를 정부가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이런 얄팍한 변명으로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은, 정부가 아직도 ‘시설의 끝을 잡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계획 단계에서부터 단어 하나 눈치 보며 제대로 쓰지 못하는 정부가 정책을 만든다 한들, 원칙에 기반하여 계획대로 이행할 수 있을지 신뢰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하다.
과거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인식을 지우겠다며 ‘장애우’라는 단어를 발명해 사용하다가 오히려 장애인 당사자들의 강한 반발에 부딪힌 사례가 있다. 사회에 만연한 비장애중심주의는 내버려 둔 채, 포장지만 그럴듯하게 씌우려는 시도였기 때문이다. 이는 ‘나는 장애인을 친구로 대하는 착한 사람’이라고 위안 삼는 비장애인의 ‘기분’을 맞추겠다는 의도가 투명해서 더욱 공분을 샀다. 정부 관계자들 역시 스스로 물어보길 바란다. ‘탈시설’이라는 단어 사용을 회피함으로써 무엇을 가리고, 누구의 기분을 해치지 않으려고 하는지. 정부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탈시설 정책의 제1원칙이자 목표는 장애인 당사자의 권리 보장이라는 것이다.
출처: ‘탈시설’이 어때서 < 최한별의 못다한 이야기 < 칼럼 < 오피니언 < 기사본문 - 비마이너 (beminor.com)